한국 배구의 전설, 장윤창 교수의 삶과 유산

한국 배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선수 장윤창 교수가 30일 별세했습니다. 그의 별세 소식은 많은 배구 팬들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안겼습니다. 장 교수는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선수로, 그의 경력과 업적은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장윤창 교수는 1958년 태어나 인창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최연소(17세)로 한국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습니다. 그 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 팀이 4강에 진출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한국 남자배구 역사상 국제대회에서의 최고의 성적이었습니다. 이후 그는 방콕 아시안게임(1978)과 뉴델리 아시안게임(1982)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의 배구 경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장 교수는 1983년 조직력 배구의 대명사인 고려증권의 창단 멤버로 참여하여,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함께 실업 배구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84년 슈퍼리그에서는 호쾌한 공격으로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왼손 아포짓 스파이커로서, 남자배구 최초로 '스카이 서브'를 선보였고, 그의 유연한 허리와 높은 타점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은 '돌고래'라는 별명을 얻게 했습니다.

장윤창 교수는 현역 은퇴 후에도 배구계에서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체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체육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대한배구협회 기술이사와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의 배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으며, 장 교수의 아들 장민국은 농구 선수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장 교수는 평소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며 술과 담배를 멀리했지만, 불행히도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별세하게 되었습니다.

장윤창 교수의 별세 소식에 대해 한국 배구계는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한국배구연맹(KOVO) 경기본부장과 여러 감독들은 장 교수의 업적과 인품을 기억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의 빈소는 서울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어 있으며, 오는 1일 발인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장윤창 교수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가 아니라, 한국 배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입니다. 그의 전설적인 경력과 업적은 한국 배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앞으로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 배구가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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